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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정리/루크 K. 윈스턴

구원의 또 다른 이름

by 보뚜~ 2022. 12. 12.

1.

 기도실을 나와 채도 낮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익숙하고, 수없이 다녔던 길임에도 끝에서 끝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머릿결에 하얀색을 머금은 소년이 창으로 드리우는 햇살을 받으며 무기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창밖에 무언가가 보일까. 눈부신 탓인지 바깥에 시선을 두어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또각 또각, 주변의 인기척들을 흘려듣다 거대한 실내에 다다랐다.

 

 문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닿을 듯한 책장들이 빼곡히 들어찬 전경이 보였다. 사람은커녕 사서조차 없는 넓은 공간, 책장들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며 소년의 하얗고 거친 손을 물들였다. 찾는 것이 있는 듯 소년은 낡은 책들의 표지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눈을 굴렸다. 정적과 허공에서 간헐적으로 반짝이는 먼지 사이에서 두꺼운 책과 얇은 책을 한 권씩 꺼낸 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들을 품에 안고 공용 책상에 앉았다. 표지가 닳아 제목을 읽을 수 없었으나 소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건 제가 찾던 책이요, 이 안에서 저는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었다.

 

 책장을 넘기며 처음 이곳에 오게 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신학은 예술과 무척 비슷한 결을 가졌다. 어떤 식으로든 표현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무엇이 ‘정답’인가는 없었다. 세상의 이치는 사람의 머리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신을 경배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을 찬미하는 거겠지. 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은 아니었지만 많은 것들을 창조했던 아버지가 기억났다. 그는 재능을 갖고 있었고 많은 이들을 기쁘게 했다. 소년은 나고 자라며 그의 손을 동경했다. 어린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꺼이 여기셨는지 신께서는 제게 특별한 축복을 주셨다. 하여 이 학교에 들어오면서도 생각했다. 신을 향한 사랑은 제 운명이 나니, 이 힘은 오로지 하늘에 공을 돌리기 위하여 쓰겠노라고. 하늘에 희게 빛나는 1등성처럼 깨끗한 꿈이었다. 설마 하니 그 희망이 이런 식으로 이지러질 거라곤 생각지 못한 채.

 

 세상엔 이해는 가더라도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일들도 있다. 신의 세계는 뒤틀렸고, 신께 구원받고자 했던 어린 영혼들은 모두가 동등하게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바쳐짐이 있고 희생이 있었으며 부분적인 구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손은, 이 손만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결은 석고상을 닮았을 만큼 거칠었다. 이렇게나 노력했음에도 제 꿈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다 자란 루크는 붉은 눈을 굴리며 체념했다.

 

 뿌리 깊이 박힌 무기력이 발치를 맴돌아 문득 시린 기분을 선사했다. 이렇게나 햇살이 따사롭건만,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무감하게 또 무심하게. 초점을 잃은 눈이 문득 돌아오니 제가 넘기던 페이지가 내내 백색이었음을 느꼈다. 이상하다, 위화감을 느끼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작은 인용 문구가 보였다.

 

아가페(Agape). 신이 인간을 향해 전하는, 거룩하고 조건 없는 사랑.

 

 갑작스레 제게로 제시된 단어를 루비색의 눈동자가 바라보았다. 한참이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세상 속에서 가만 그 아름다운 단어를 더듬었다. 신의, 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 무기력 속에서 뒤섞인 기억들이 제 감정을 여과 없이 흘려보냈다. 세상에 이러한 사랑이 있었던가. 내가 이런 사랑을 목격한 적이 있던가.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주 익숙한 소리였는데. 좌우로 돌던 시선이 앞을 향했을 무렵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향해 손을 짚고 퍽 적극적인 자세로 친밀감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만은 보이 지 않았다. 마치 그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레드를 이해해.’

 

‘레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네가 돌아와서 기뻐.’

 

 얼굴을 알 수 없음에도 무척 그리운 목소리라 여겼다. 들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제이드, 노엘. 이름을 입술에 올리자 눈 깜박임 한 번에 인영이 사라졌다. 키아라, 루크는 어느덧 이 도서관 전체가 애틋하리 만치 노란 햇살에 둘러싸였음을 알았다. 익숙한 기억들이 루크를 마중했다. 책에서 찾고자 했던 내용이, 가치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진리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더니 참말이었다. 두꺼운 책을 안았다. 이것은 단순한 사전이 아니었다. 레드와 옐로의 기억이 만든 두께였고, 성서였다.

 

 이 세상에 전지전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신조차 어떤 의미에서 완벽할 수 없었다. 불멸이 되어 학교에 영원히 얽매인 루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닳지 않는 애정 하나 또한 알고 있었다. 피그말리온은 모사꾼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끝까지 아름답다고 해 주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 스스로만은 제 작품들을 사랑해 주겠다고, 나는 너를 이해하며 네가 내 옆에 있어서 기쁘다고. 자신의 부족함밖에 보이지 않던 어린 소년에게 신의 사랑보다 더한 애정을 전했다. 넘어졌음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사랑이 보호대가 되어 무릎이 까지지 않도록 지켜준 탓이겠지.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무언의 소리를 들었다. 가슴속 외침을 따라 책에 쓰인 단어를 더듬었다. 아가페. 그래, 너는 누구에게나 햇살이었고 이토록 따뜻했지.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죄인을 숨기고 그 죄로 함께 타락해 버린 자신이었지만, 이런 저마저도 거룩하다 해 준 너야말로 신격이 아니었을까. 모사꾼은 배덕하게도 신이 아닌 인간을 처음으로 찬미했다. 여태 느껴지지 않던 온기가 몸으로 스미고 발밑의 냉기를 물러냈다. 눈을 뜨자 붉은 눈이 누군가의 부드러운 초록빛 눈과 마주쳤다.

 

“꿈인데도 찾아와 준 거야? 내가 헤맬까 걱정돼서?”

 

 물음에 노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별다른 말은 없어도 표정이 답인 듯이. 세계가 천천히 조각나 사라지고 하얀 공간에 둘뿐이 되었다. 루크가 다가가 손을 내어 봤다. 뺨에 닿는 그 순간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아 신기했다. 너는 항상 내 세계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구나. 외로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렇게나 모습이 멀쩡할 만큼, 내게 있어 강렬한 존재로구나. 이렇게나 알 수 없으 면서도 애틋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온화한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이 바람은, 이곳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님을.

 

“지켜줘서 고마워. 너는 늘,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날 이끌어 주더라.”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고맙고 또 사랑스러운 일인지 넌 모를 거야. 아주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고 이내 발끝이 부유했다. 몽롱하게 의식이 떠올랐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루크는 노엘에게로 손을 뻗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욕심, 나의 욕망이며, 신보다도 더 가까운 나의 신이여. 노엘을 향해 마주 미소를 지으며 루크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간증을 했다. 생애의 처음부 터 신께 귀의했나니 다만 다음 여정이 있을 뿐이었다.

 

 나의 신은 언제까지고, 어떤 모습을 하고라도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저주와 운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등불이 되리라. 어둠 속에서 영원히 빛나서, 네가 또 한 번의 삶을 되풀이하고 돌아왔을 날에 저를 찾기 쉽게 하리라. 그렇다. 불멸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가장 좋은 일. 루크는 믿음이 두터운 사내였다. 하여 언제나 비극 속에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줄 알았다. 하물며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신에게는 어떠하랴.

 

 현실의 노엘이라면 말해 줄까. 가장 너다운 생각을 했다고. 가능하다면 직접 칭찬을 듣고 싶었다.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지금 만나러 갈게. 입술만으로 읊조리며 의식의 세계에 다다르면, 포근한 침대에 눈 감은 이만이 남았다.

 

 

2.

 

“이때 정말 궁금하기만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도 아닌 것 같아.”

 

 물에 잠긴 듯 흐릿하게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달콤한 속삭임, 루크 윈스턴 이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 그 색은 갓 잠든 여름밤 이부자리에 드리우는 달빛을 닮았고, 어조는 지금 루크 본인의 몸을 감싼 시트처럼 보드랍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머리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음에도 애써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묻혀 있고만 싶었다. 다시 잠들 것 같아서가 아니라, 네 품이 저를 영원히 묶어놓을 것처럼 포근해서였다.

 

“루크. 나는 이 완전한 관계가 변한다면, 언젠가 그 끝에 이별이 생길 것만 같았어.”

 

 루크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알고 있었다. 노엘의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풍경은 루크에게도 매우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 상실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족쇄처럼 달고 다녔다. 소중한 친구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가는 광경들을 보며 자기 일처럼 아파하곤 했었지. 사랑이 전부일 순 없다고 그는 믿는 듯했다. 하지만 노엘의 사랑이 구원해낸 유일한 생명은 자기 자신을 바쳐 이를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있는데도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애틋함과 안쓰러움을 담아서 그리 고하고 싶었다.

 

 그래서였던지도 모른다. 루크는 노엘의 두려움을 마치 없던 일인 양 집어삼켰고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 같던 관계가 프리즘처럼 시시각각 빛을 달리했고, 이는 루크가 의도한 바가 맞았다. 다만 한 가지 두려웠던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노엘이 제 하는 짓을 밀어내진 않을까 하는 바였다. 밀어낸다면 당연히 자리에 멈췄겠지만,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질 듯한 느낌도 들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유는 뻔하다. 사랑이 저와 거리를 두고 있고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니, 당연히 애가 탈 수밖에.

 

 하여 루크는 노엘이 하는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끌어당겼고, 노엘은 제 품 안으로 쓰러졌다. 같은 겁쟁이였던 주제에 겁쟁이인 너를 자신의 감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서로에게 다시는 잊지 못할 기억을 심었다. 다시 한번 관계의 각도가 크게 바뀌었던 날이었다. 어렴풋이 잡히는 노엘의 욕심의 형태를 처음 더듬었던 나날들. 호기심이라 치부해도 좋으니 노엘에게 닿겠노라는 제 마음만은 진실로 남길 참이었다. 그랬는데. 일순 루크는 노엘이 제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날 네가 스스로 입술을 맞춰왔던 때를 닮았다. 이건, 단순한 고해성사가 아니로구나. 다시금 눈가가 떨렸다. 노엘의 삶의 무게 가, 애정이, 깊게 떠밀려온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말야, 루크. …욕심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토독, 톡, 봄비에 지면이 서서히 젖듯. 루크는 마음이 끝자락부터 서서히 아려옴을 느꼈다. 그래. 스며드는 애정. 긴 시간을 거쳐 어느샌가 자신을 감 싼 애틋함. 발목까지 잠기는 파도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눈꺼풀에 빈틈이 생 겼다. 속눈썹에 가려져 눈에 띄지는 않았겠지만, 더는 침묵할 자신이 없었다. 더 듣다간 제 귀가 녹거나, 혹은 깨어날 타이밍을 놓치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두려워했으면서. 너도 나 같은 겁쟁이였으면서. 길을 트 고 나니 그것이 제 정해진 물길인 양 밀려 들어온다. 치사하게도, 얄밉게도, 사랑스럽게도.

 

“내가 매일 눈을 떴을 때의 내 세상이 하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앞으로 도 영원히.”

 

 노엘은 마지막 빗방울을 입에 담았다. 그것은 새하얀 꽃송이의 이파리에 닿 았다. 여린 꽃잎은 태생이 들꽃이라, 저를 적시는 빗방울에 행복하게 흔들릴지언정 낙화(落華)할 일은 결코 없었다. 희디흰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담아서 루크의 입술이 노엘에게 닿았다. 작은 기습이었다. 혹은 우리가 이룩한 또 하 나의 작은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반쯤만 뜬 흐릿한 눈이지만, 루크의 붉은 눈동자는 노엘의 둥그래진 녹빛 눈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제부터 깼어?”

 

“나 몰래 사랑고백할 즈음에.”

 

“다 들은 거야?”

 

“다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

 

 노엘이 입술을 비죽였다. 싫어서나 삐져서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 낯간지러워서, 설마 하니 자기 속삭임을 다 들었으리라곤 예상치 못해서였다. 루크가 마주 보며 엷게 웃었다.

 

“난 영원히 네 곁에 있기로 했잖아.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네가 어떤 모습이 어도.”

 

 그러니 네 세상은 언제나 하얗겠지. 루크가 덧붙였다. 금세 표정이 풀린 노엘은 루크의 말에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살면서 가졌던 가장 큰 욕심을 루크는 이번에도 단숨에 이뤄 주었다. 노엘이 보는 루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조용하고 자기 세계도 확고해서, 한때 그것에 깔려 시들 뻔한 적까지 있었을 만큼 여렸으면서. 그런데도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강인함 또한 갖고 있었다. 노엘은 언제나 이런 루크를 동경했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참 이상해.”

 

“뭐가?”

 

“루크는 나보다 강해. 내가 약해질 때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 그래서 늘 내 욕심을 놓치지 않고 받아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아.”

 

그 말에 루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노엘의 허리를 껴안았고, 이내 웃음 너머에서 애틋함과 쓸쓸함을 꺼내 표정에 실었다.

 

“난 강하지 않아, 노엘.”

 

“그럼?”

 

“강하진 않지만, 강해져야 할 때 어떻게 견디는가를 잘 알 뿐이야. 그리고,”

 

루크가 고개를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 아름다운 시선과 마주했다.

 

“노엘이 있어서 무엇이든 견딜 수 있을 뿐이야. 옐로가, 노엘이 나를 구해 줬으니까. 네가 없었다면 난 진즉 무너져내렸을 테니까.”

 

 누구나 약하다. 세상에 완벽하게 강인한 자는 없다. 상처를 그림자처럼 달고 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이가 곁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루크는 꿈에서 깨어난 반드시 이를 노엘에게 전해야 했다.

 

“노엘은 내 신이야. 나를 사랑해 준, 나만 사랑해 주는 나의 신. 욕심이라 는 이름으로 나를 구원해 준 사람. 나의 구원자.”

 

사람이 사람된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의, …영원한 사랑.”

 

바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다.

 

"…루크.”

 

“그러니까 너를 약하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비겁하지 않아. 절대.”

 

“…….”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들 앞에선, 소중한 것을 반드시 잃어야만 하는 상황에선.”

 

“…루크.”

 

“그러니까, 내 구원자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루크의 목소리엔 속상함 대신 다정함이 담겼다. 노엘은 이 화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투며 태도며 영락없이 자신을 닮아 있었으니까. 아. 짧게 탄식한 노엘은 이내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고야 말았다.

 

“내가, 루크에게 감히 신이 되어줄 수 있을까? 신은 완벽하거나 전지전능해 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잖아.”

 

“그래도 괜찮아. 내 신은 원래 그렇다고 할래.”

 

 루크의 대꾸에 노엘의 눈이 호선을 그었다. 하얀 머리통에 입을 맞추고 하관을 부볐다. 사랑스러운 사람. 그래서 평생 놓고 싶지 않은 사람. 오로지 저 만이 루크의 사랑스러움을 가장 자세하게 안다. 그 사실만으로도 노엘은 몇 번의 이별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루크.”

 

“응.”

 

“우리가 쌓은 욕심 위에서, 영원히 행복하자.”

 

“응.”

 

욕심의 빛깔은 애정이요, 그것은 구원이 가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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